Home | Contact Us    
   www.onesolution.co.kr
Information        
      Information
옛날의 그 집 - 박경리詩-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743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편(‘현대문학’2008. 4월호 발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마지막 행이 턱, 걸린다.


◇ 박경리 삶의 발자취

-1926년 10월 28일(음력) 경남 통영 출생

-50년: 남편 김행도와 결혼 4년 만에 사별

-55년: 김동리 추천으로 단편 ‘계산’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등단

-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 발표

-69년: 대하소설 『토지』 집필 시작

-72년: 『토지』 1부로 월탄문학상 수상

-92년: 보관문화훈장 수훈

-94년: 집필 26년 만에 『토지』(전21권, 나남출판) 탈고

-96년: 호암상 예술상 수상,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기념메달’ 받음

-99년: 강원도 원주에 토지문화관 개관

-2003년: 『토지』를 잇는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 가자’ 연재를 시작했으나 3회를 끝으로 중단

-2008년: ‘옛날의 그 집’ 등 시 3편 발표


-2008년 5월 5일: 뇌졸중 등 지병으로 별세

- 사마천 (BC.145~86, 한) -
사기는 중국역사상 가장 우수한 역사시라고한다. 작자인 사마천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이 사기는 그 비극적인 인생관으로 부터 쓰여졌다.
사마천은 한나라 경제 5년(BC.145년)에 태어났다. 부친인 사마담은 태사령(역사기록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임명 되어 수도 장안에서 멀지않은 무릉(무제의 능묘)에서 살게되었다. 무제는 무릉의 번성을 위해 부자와 상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곧 무릉은 신흥 대도시가 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사마천도 다양한 사람들과 왕래하며 사교성을 쌓았다. 사마천은 10세가 되는 해부터 스승인 공안국(공자의 11대 손)에게서 고문 경서를 배웠다.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한 무제(漢武帝)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사마천이 36살 때인 기원전 110년, 사마담(司馬談)은 한 무제(漢武帝)가 태산(泰山)에서 거행된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죽을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기원전 108년, 사마담(司馬談)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3년뒤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올라 사관의 기록이 있는 석실과 금궤의 책들을 꺼내 읽었다.
그후부터 사마천은 틈이 나는 대로「사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5년 후 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된다.한 무제의 흉노 토벌 사업중, 신궁으로 이름높은 이광의 손자 이릉은 흉노 토벌을 위해 기련산으로 향했고, 5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이릉에게 흉노의 주력부대를 분산시키라는 명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릉은 8만이나 되는 적의 대군과 만나게 되고, 적은 군사로 8日간 혈전을 벌인 이릉은 결국 흉노에게 투항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크게 노하고 배반자 이릉을 토벌할 군사를 파견하려 한다. 군대가 파견된다는 소식에 사마천은 상소를 올려 무제의 이릉토벌을 반대 하고, 무제의 흉노토벌 정책에 강한 비판을 하고 이를 계기로 왕의 심기를 건드린 사마천은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그의 나이 48세 때이다.
그 당시 사형을 피할 방법은 2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한가지가 보석금(5만양)을 바치고 풀려나는 것이었으나 가난한 사마천에게 돈이 있을리 만무했다.
두번째 방법은 궁형(宮刑: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이 형벌은 일반 학자들에게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받아들일수 없는 형벌 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명을 이루기 위해, 500년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궁형을 택하게 된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치욕을 극복하고 계속해서「사기」써내려갔다. 흩어진 천하의 구문(예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은 물론, 왕들의 사적을 탐구함으로써 그 성쇠를 관찰하고 논증하였다. 그리하여 약 BC.91년에「사기」130권을 탈고하였고, 본기•표•서•세가•열전 등 5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모두 130편으로 52만 6천5백 자(字)로써,「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하였다 요(堯),순(舜)으로부터 한무제까지 2천년의 역사를 저술한 것이다.
"나는 황제 이래, 태초 연간에 이르기 까지의 사실을 역술하여 130편을 지음으로써 끝을 맺기로 한다."
사마천은 역사가 이지만 자신에 대하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 연대기에 대해서는 사후 문헌에 의해 추측될 뿐이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도 자살설(딸을 출가시키고)과 처형설(친구의 투옥에 대한 글)이 있지만 명확안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그는 자신의 모든 생애를「사기」의 저작에 바쳤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땀과 피, 그리고 눈물이 뒤섞여 있는 그의 한맺힌 생애의 결정체라고 할수있다.
「사기」에는 중국 민족의 3천 년 역사가 실려 있다

      리스트        수 정      삭 제